합동추모관

이철영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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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원(柳大源)의 문인이 되어 한학을 공부했고, 1904년 일본인들이 철도 공사를 하던 중 공주에 있는 선영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陳情書)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해 철도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리고1905년에는 유태(李惟泰)의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교정, 발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기의려문(起義旅文)’이라는 항의문을 지어 조정과 일본에 보내 항의했다. 그는 기의려문에서 “을사늑약은 법적 형식이 결여된 불법적인 조약으로 을사 적이 여기에 찬성하여 맺어진 것으로, 백성들의 의사와는 상반되는 것이며, 합법성을 의미하는 조약이 아닌 늑약인데다 불법과 강제성을 띠었으니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 정부에 치일국정부서(致日國政府書)를 보내 "조선의 귀신이 될 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수차에 걸쳐 일경의 취조를 받았으나 그때마다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19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아야 했고, 한번은 일제가 추진하는 민적에 등록하길 거부해 69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이렇듯 빈번히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그는 결국 1919년 12월 6일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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