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白善燁, 1920년 11월 23일~2020년 7월 10일)은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합동참모의장 등을 지낸 군인이자 교통부 장관 등을 지낸 관료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1945년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광복을 맞아 평양에 돌아왔다.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소련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았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개성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초기 인민군에 패퇴하여 수도 서울이 조기 함락되는 원인을 제공하였으나 미군과 함께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며 32세에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고,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1952년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휴전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으며, 한국종합화학∙한국에타놀 사장도 역임하였다. 동생 백인엽과 인천대학교 등 선인재단을 설립했다. 2020년 7월 10일에 9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본관은 수원(水原), 호는 우촌(愚村)·운산(雲山)이다.
1920년 11월 23일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아버지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의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였다. 1926년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주변에 의지할 친척이 없어, 홀어머니 아래에서 동생들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백선엽이 여덟살 되던 1927년 1월에 생활고로 인하여 온가족과 함께 대동강에 뛰어 자살하려고 했으나, 백선엽의 큰누이가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길쌈과 밭일, 누이들은 공장의 여직공으로 입사하여 가정의 생계를 꾸렸다.
유년 시절의 그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다. 평양부립도서관에 자주 다니며 책을 읽고 신문 사설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변변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인하여 평안남도 평양 약송소학교를 나온 이후 평안남도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한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되어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열하성)서 간도특설대 기박련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에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옌지)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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