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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합동 추모박태준 정치인

박태준 정치인

1927년 10월 24일 - 2011년 12월 13일 (향년 84세)추모소 개설:2020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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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님을 추모합니다.

박태준(朴泰俊, 1927년 10월 24일~2011년 12월 13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의 기업인 겸 창업주, 고위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서훈받았고,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제11·13·14·15대 국회의원(4선)과 제32대 국무총리(2000. 1.~2000. 5.)를 지냈다.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상남도 양산군과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살 때 일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45년에 와세다 대학교 예과(예비과정)에 입학했으나, 대한민국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였다.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년 후 1948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학교 생도 시절 제1중대장은 당시 탄도학 교관이였던 박정희 대위였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가 5.16 군사 정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신뢰하던 박정희가 그에게 만에 하나 쿠데타가 실패한다면 가족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이는 박태준이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한 이유이기도 하며, 당시 마약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박지만을 박태준이 다잡아 주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의 입안에도 관여하였다. 1961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법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여 196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 내각에서 고위급 관료들에 대한 정부의 4년제 대학 학위 이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1963년 9월 22일에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주요 상훈으로는 충무무공훈장(1950, 1952),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1974), 영국 금속학회 베서머 금상(1987), 레종도뇌르훈장(1990), 노르웨이국왕훈장(1991), 윌리코프상, 한국경영자대상(1992)을 받았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 이 있다.

또한 역임으로는 1975~1990년 한국철강협회 회장, 1980~1981 한일의원연맹 회장, 1981년 한일경제협의회 회장, 1988~1993 한일경제협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예편 후 기업인으로 전향한 그는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로 전환했고, 1968년 4월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이 되어 10년 만에 철강을 연간 550만 톤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 냈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로 당선돼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하고,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다. 1990년 3당 합당 후에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박태준은 1992년 10월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2001년에 미국 코넬대학교 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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