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朴容萬, 1924년 3월 15일 ~ 1996년 10월 19일)은 정치인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영암(嶺巖). 경상북도 풍기군 출신이다.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대통령비서관으로 근무했고,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다.
일본 유학 주오 대학 졸업 후 귀국,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해방 후 우익 청년단체에서 활동했고 1946년 7월 이철승(李哲承) 등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 창설에 참여했다. 이때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1948년 정부수립 직후 대통령 비서관에 발탁됐다. 1950년에 원외자유당이 창당될 때 감찰부 차장으로 참여하였으나 민족청년단계(약칭 족청계) 세력에 밀려 제명됐다가 1953년 복귀, 자유당내 족청 세력을 제거했다. 1954년에 원외자유당의 선전부장이 됐다가 이기붕 등의 독단적 운영에 반발하여 탈당, 신민당에 참여했으며, 7대, 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낙마했으나 9대, 10대, 12대,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3대 국회에서는 국회 행정위원장을 역임했다.
1924년 경상북도 영풍군 풍기읍에서 아버지 박은식(朴殷植)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은식은 풍기읍내에서 약국을 경영했다. 학업에 열중하여 풍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937년 김천고보에 입학했다.
1942년 김천고보(5년제)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주오대(中央大)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다. 1944년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고, 와세다대 문학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1945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재학 중 해방되자,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1949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에서 유학생동맹 위원장이 되었고, 이후 우익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민족통일총본부 청년국 최고위원, 1946년 7월에는 이철승(李哲承) 등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하여 공동의장의 한사람이 되었다. 반공·반탁 투쟁에 앞장섰으며, 그 과정에서 이승만(李承晩)의 신임을 받아 1948년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일하였다.
1951년 대한청년단 조직에 참여, 대한청년단 선전국장과 대한청년단 영주군단장을 역입했다.
25세인 1950년에 정계에 투신하여 1973년 9대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른바 '칠전팔기'의 주인공으로 회자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주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3대, 4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자유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지 못했다.
1950년에 원외자유당이 창당될 때 감찰부 차장으로 참여하였으나 민족청년단계(약칭 족청계) 세력에 밀려 제명되었고, 1953년에 다시 조직부장으로 복귀해서, “자유당 내 족청계를 모두 제거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총무부장 이기붕(李起鵬) 등과 함께 당내에서 족청계를 축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1954년에 원외자유당의 선전부장이 되었으나 3대 총선 후 이기붕 등 주류파의 독단적 당 운영에 반발하여 탈당하였다.
1971년 8대 총선에 영주군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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