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국회의원, 초대 내무부 장관, 국회부의장, 서울특별시장, 공화당의장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승만의 측근으로 하와이에서 그를 도와 활동하다 이후 임정 구미위원부 활동, 삼일신보 제작 등에 참여하고, 이승만을 보좌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며 9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의 비서, 민주의원 사무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내무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 초기 집권세력의 실세로 통했다. 이후 이승만의 외교특사로 활동하다 1948년 친이승만 성향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56년과 1960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제2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 1963년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하였으며, 제3공화국 출범 이후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울특별시장, 민주공화당 당의장서리 등을 지냈다. 1968년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역설하여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적극 지지하였다. 종교는 개신교로 교회의 장로를 지냈다. 1980년 정계에서 은퇴, 사회 원로로 활동하였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내내 윤보선과 정치적 거취를 달리했다. 한민당으로 정계입문하였으나 입각 후 한민당을 탈당,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한민당과 민국당에 대항하여 친여 성향의 대한국민당을 조직하여 야당을 견제하였다.
윤치영은 1898년 2월 10일 경성부 안국동에서 무관 출신 윤영렬과 한진숙의 6남 2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집은 굉장히 부유하여 집의 크기가 2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윤영렬의 자식들은 형 윤치오, 윤치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등과 누이 윤활란, 윤노덕, 이름미상 등 3명의 누이가 있으며 첩의 자식까지 합쳐서 총 9남 3녀를 두었다.
윤치영의 9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다.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에 이르렀으나 술을 좋아하여 가세가 몰락하였다. 사후 증 이조참의, 의정부참찬에 거듭 추증되었다.
윤치영의 조부이자 윤득실의 셋째아들 윤취동의 대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아버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사촌 형 윤치호가 다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유년기에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으로 내려갔다. 아산에서 조카 윤보선과 함께 한문 서당을 다녔고, 정식으로 한학자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이후 안성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안성에 있다가 다시 경성부로 올라와 교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졸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30년 연상의 맏형 윤치오와 윤치소, 사촌 윤치호의 집에 드나들던 노백린, 박영효, 유길준, 양기탁, 이승훈, 이승만, 김광서 등의 청년지사들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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