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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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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독립운동가

1861년 8월 7일 - 1905년 11월 30일 (향년 44세)추모소 개설:2025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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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님을 추모합니다.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이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사애(思厓),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민영환은 1861년 서울시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민겸호였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세도를 구가하던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 거상을 위해 사직하였다.

4년 후인 1886년에 이조참의로 제수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고, 이후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 독판내무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1895년 8월에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10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부임하지 못한 채 사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귀국 후에 그는 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 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 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였고, 보다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할려다가 수구 세력인 민씨 일파에게 반감과 미움을 사게 되어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참정대신(參政大臣)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그리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 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 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 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94년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그가 자결할 당시 살던 집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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