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姜宇奎, 1855년 7월 14일~ 1920년 11월 29일)는 일제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자(字)는 찬구(燦九), 호(號)는 왈우(曰愚)이다.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그는 조선 평안도 덕천에서 출생했다. 지난날 한때 경상도 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경상도 밀양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평안도 덕천 귀향 후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공부하였다. 1884년부터는 함경도 홍원으로 이주하여 한의사로 인술을 베푸는 한편, 아이들에게는 성리학 학문을 가르쳤다. 전언에 의하면 모종의 애국운동에 관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피신 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홍원으로 이주한 강우규는 홍원에서 온 후 농사를 하지 않고 읍내에 자리를 잡고 주로 상업에 종사하였던 것 같다. 특히 그는 홍원으로 솔가할 당시 상당액의 거금을 갔고 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강우규는 홍원의 중심가인 남문거리에서 아들 중건을 앞세워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이 상점에서 주로 물감, 담뱃대, 면사, 포목 등을 팔았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장사꾼들에게 장사 밑천도 되어주고 돈을 저리로 빌려주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라오허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자 강우규는 이에 크게 분개하였다. 당시 그는 50이 넘은 중노인이었다.
강우규는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당하자 국권으로 회복하기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10년 가을 강우규는 망명을 결심하고 우선 큰 아들 중건부부와 자녀 3명을 노령으로 이주시켰다.
그는 이듬해인 1911년 봄에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북간도 두도구로 이거 하였다. 그곳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1915년 요동의 라오허현으로 옮겨가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이 마을은 강우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룩된 것이며, 후에 노령과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1917년 지린성 동화 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 뒤 광동중학교와 신흥촌을 다른 한인 교포에게 넘긴 뒤 그는 국내에 잠입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서 경성부로 잠입했다.
1919년 9월 2일,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현재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신임된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남대문역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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