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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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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독립운동가

1889년 11월 24일 - 1930년 1월 24일 (향년 40세)추모소 개설:2025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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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님을 추모합니다.

김좌진(金佐鎭, 1889년 11월 24일 ~ 1930년 1월 24일)은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군인이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신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나이 17세(1906년)에 그는 집안의 가노를 해방 및 땅을 분배하였고 민족적 자립을 위한 무장 독립 운동의 선봉에도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한제국 교육 사회 사업 르네상스 혁신 선구자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형평사 운동에도 관여했다.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흔히 청산리 대첩의 대표 장군으로 나온다. 만3살 때(1892년)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살림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모친인 한산 이씨에 의해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한 뒤 1907년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즉 개화한다는 뜻인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뒤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다.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였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 동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자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복역 중 김구와도 조우한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었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다.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한편, 1918년 박상진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실현은 하지 못했다.

1918년 길림에서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김좌진은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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