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용(鄭鎬溶, 1932년 9월 10일 ~ 2026년 9월 12일)은 대한민국의 前 군인, 정치인이다. 전두환의 육사 동기이며 12·12 군사 반란을 이끈 신군부 핵심 5인방의 한명이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의 현장 지휘자로 알려졌다.
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후일 육군사관학교 동기가 되는 노태우와 알게 되어 오랜 친구이자 동창으로 지냈다.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55년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노태우 등과 함께 사적 군내 조직인 하나회에 참여했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군사 반란에 가담했으며, 이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에도 참여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특전사령관, 제3야전군 사령관을 거쳐 제25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으며,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제5공화국 시기에는 군부 인맥에서 전두환에 이어 사실상 서열 3위로 평가되었으나, 제6공화국 출범 이후 노태우와의 정치적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18세가 되기 전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제7보병사단 소속으로 경북 영천 전투 등 참여하였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지만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 후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대구 육군본부에 근무 중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하여 육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나회가 다시 전두환 파벌과 윤필용 파벌로 나뉠 때 그는 전두환 파벌에 가담하였다. 그 뒤 군 복무 중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63년에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육군본부 인사장교를 거쳐 중령으로 재직 중 1965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1967년에 수료하였다. 같은 해 1967년에는 육군본부 진급계장을 거쳐 수직이동하여 육본 진급과장으로 승진했다.
그 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육군 제9보병사단 예하대대의 대대장으로 베트남에 파견, 활동하고 귀국하였으며 1971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연대장 보직을 두루 역임한 뒤 1974년 특전사 제7공수특전여단이 창설되면서 초대 제7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77년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 1978년 대구 주둔의 육군 제50보병사단장이 됐다. 그러나 하나회의 리더 윤필용의 발언 파문(일명 윤필용 사건)으로 한때 예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한편 그와 같은 무렵 의무병과에 동명이인인 '정호용'(鄭浩鎔)이라는 장성도 있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5월 18일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3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추모합니다
분향함을 클릭하여 향을 꺼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