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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합동 추모이만섭 정치인

이만섭 정치인

1932년 2월 25일 - 2015년 12월 14일 (향년 83세)추모소 개설:2025년 11월 12일
62명 방문

이만섭님을 추모합니다.

이만섭(李萬燮, 1932년 2월 25일~2015년 1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이다. 제6·7·10·11·12·14·15·16대 국회의원(8선 출신)으로, 제14대 국회와 제16대 국회에서는 각각 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6대 국회에서는 국회법 관련 개정에 따라 첫 당적 없는 국회의장이 되었다. 호(號)는 청강(靑江)이다.

이만섭은 1932년 2월 25일에 경상북도 대구부 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륜중학교 4학년 때 약 1년간 김재규가 체육교사로 부임하여 사제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당시 김재규는 육사 2기 졸업후 임관하였다가 잠시 군을 떠나 있을 때였다. 당시 농구선수이자 학업성적도 우수했던 이만섭을 김재규는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의 인연이 훗날까지 이어져 어려운일이 있을 때 서로 의논하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이만섭은 그의 저서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에서 밝히고 있다.

1951년에 연희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한 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주일 특파원과 주미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직후 발탁되어 1963년 10월에 공화당에 입당, 대선 후보 박정희의 지지 유세와 찬조연설을 다녔다. 그 해 11월에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고, 그 후 제7·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8년에 개최된 국제의원연맹 제5차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3선개헌에 대해 처음부터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를 했다. 주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자 1969년 6월 29일,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면담을 가진후에 박정희의 뜻이 완고함을 알고 생각을 바꾸었다. 2시간 30분간 이어진 면담에서 개헌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박정희를 설득하려 시도했다. 419혁명으로 몰락한 이승만 정권의 예를 들어가며 직접 만든 헌법을 준수하여 평화적 정권이양이 순리임을 설명하였다. 후계자에게 물려주었다가 4년뒤에 재집권을 하는 방법등을 제시했으나 박정희의 개헌의지가 분명하여 설득에는 실패했다.

독대를 가진후 뜻을 바꾼 이만섭은 '3선개헌 선행조건' 5가지를 7월 29일, 비공개로 진행된 영빈관 의원총회에서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의원총회에서 의결되어 공식입장으로 결정되었고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의 책임자 이후락, 김형욱은 그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날 것.

둘째, 중앙정보부는 대공사찰에만 전념하고 정치사찰은 일절 하지 말 것.

셋째, 당 체질을 명실 공히 창당이념에 맞도록 올바르게 개혁할 것.

넷째, 국민투표는 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명정대하게 실시할 것.

다섯째, 권오병 문교부 장관 불신임 파동때 제명당한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정태성, 김달수 등 제명의원 5면을 복당시킬 것.

의원총회를 도청하여 이 소식을 접한 김형욱은 분노하며 이만섭 암살지령을 중정 간부에게 내렸다.

2004년 제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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