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李蘭影, 1916년 6월 6일 ~ 1965년 4월 11일)은 전라남도 목포 출생의 일제강점기 트로트 가수이다. 대표곡으로는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등이 있으며,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진방남)과 함께 가요계의 3보(寶)'라고 불린다. 1936년 같은 가수로서 함께 노래했던 김해송과 결혼을 하게 된다. 해방 후에는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극단 등에서 활동했으며, 6.25로 김해송이 납북된 후로는 자식들과 조카들을 혹독히 연습을 시켰으며 그들은 각각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같은 가수였던 남인수와 사랑이 싹트는데, 남인수의 폐결핵으로 사랑은 얼마 가지 못하였으며, 2~3년이 지난 1965년 서거했다.
목포에서 친일논란으로 토론회가 열린 가수이다. 이난영은 <신춘엽서>, <이천오백만 감격>과 같은 친일 가요를 두 세 곡 정도 불렀다. 이난영은 <이천오백만 감격>이라는 조선 징병제 시행을 기념하려 제작된 노래에 참여했다. 이런 사실로 미뤄 그의 친일 행적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엔 그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문화예술 분야의 친일 여부 판단 기준인 지속성과 반복성, 적극성을 놓고 볼 때 현재까지 2~3곡만 밝혀진 상황이어서 지속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천오백만 감격>을 같이 부른 남인수와 김해송은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다. 이난영은 단편적인 친일 행적은 나오지만 추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지는 않은 인물이다.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에, 당시의 주소지 상으로 목포부 양동 72번지에서 태어나게 된다. 아버지는 이남순(李南順)으로 철공업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의 이름은 박소아(朴小兒)였다. 또 두 살 터울의 오빠였던 이봉룡이 있었다. 가정 형편은 넉넉지 못하였으며,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집안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정(다이쇼) 12년인 1923년 4월 2일 현재의 북교초등학교인 목포공립보통학교의 여자부였던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는 화재로 인해 합병폐교가 되었음에도, 학교 다닐 적의 학적부가 남아있던 이난영의 학적부에 기재되어 있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던 이옥례(李玉禮)가 아니었으며, 이옥순(李玉順)으로 기재가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교과목의 점수는 3점부터 8점까지 다양하였는데, 아마 가정 형편으로 인해 1학년과 3학년 때 휴학을 해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음악 과목인 창가(昌歌)의 3학년 점수만 유일하게 9점을 받아, 어릴 때부터 노래에 두각을 나타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난영은 4학년이 되어서 거주지 이전을 이유로 자퇴를 하게 된다. 자퇴원서의 보호자 란에 써있었던 이름은 아버지 이름인 이남순이었으나, 도장은 오빠인 이봉룡의 도장이 찍혀 있다. 이후 오빠 이봉룡과 함께 조선면화공장이라는 솜공장에 취직을 하여서 오빠의 일을 도와주었으나, 결국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불화에 떠나간 제주도로 오빠와 함께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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